네이버 지식인에 어떤 분이 올린 댓글입니다.
“오직 행함”(?) 혹은 “오직 믿음”(?) 이런 두 가지 극단적인 주장은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론을 심각하게 오염시키고 있는 양대 산맥입니다. 특히 루터가 주장했던 ‘오직 믿음(sola fide)’을 비롯한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란 말은 성경의 가르침과 맞지 않은 극단적인 주장일 뿐입니다. 물론 당시 중세 로마 가톨릭의 부패라는 시대적인 맥락에서 보면 바울의 그러한 주장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성경의 근본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극단에 치우친 주장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히 “오직 믿음”만을 강조해서 선한 행위에 대해 강조하거나 주장하면 곧바로 율법주의자나 행위 구원론자, 예수의 은혜를 무시한 자로 격하시켜서 심지어는 복음이 아닌 이단사설의 주장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 현 개신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오직 믿음...을 강조하는 분들은 성경 전체를 읽지 않고 그저 바울 서신 중에서 단지 몇몇 구절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음 구절을 인용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마서 1:17)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에베소 2:8)
이 구절에서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으며 은혜에 의하여 받은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강조합니다. 다 맞는 말이고 진리의 말씀입니다. 다만 그들은 여기서 “선물”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확대해석합니다. ‘선물’이란 누군가가 노력해서, 뭔가를 행함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은혜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선물을 얻기 위해 무엇인가를 조금이나마 행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는 논리인 것이지요. 선물이라는 단어를 극단으로 해석해서 나오는 엉터리 같은 해석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누군가에게 호의로 선물을 주려고 하고 선물 주고 싶으니 3시까지 어디서 만나자고 했다고 보겠습니다. 극단주의자들의 논리에 따르면 그 선물을 받기 위해 3시까지 나가야 하는 것은 “특정한 행위”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되며 선물의 의미를 박탈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특히 선물을 받고자 나갈 때 감사하는 마음으로 단정하게 옷을 입거나 작은 보답으로 쓴 감사의 편지조차도 “특정한 행위”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3시까지 약속 장소에 나아야 선물을 받는데 “이건 선물이니까 내가 아무런 일을 행하지 않아도 나에게 주어질 거야.”라면서 3시에 그 장소에 나가지 않는다면 선물을 받을 수 있을까요? 아니 3시까지 약속장소에 나오라는 그 지시가 선물의 의미를 희석시키는 것입니까?
극단주의자들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구원이란 ‘선물’이라는 말의 의미를 왜곡해서 그 선물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을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정말로 그 선물을 얻기 위해서 아무 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까? 그냥 손 놓고 가만히 있거나 자기 마음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합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받는 구원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행함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 2:14,17,21,22,26)
야고보서를 하나님의 영감받은 말씀으로 믿는다면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직 믿음을 주장한 루터는 이 구절이 자기의 사상과 맞지 않다고 하여 지푸라기 서신으로 간주해서 성경에서 빼려고 했던 것은 잘 알려진 일입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 그 자체는 죽은 것이고 행함과 믿음이 함께 할 때 온전하게 될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이건 무슨 논란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분명합니다. 행함이 없는 “오직 믿음”은 죽은 것이고 반쪽자리 구원론입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디모데전서 4:16)
주님의 복음이 요구하는 것들을 “행함”으로서 우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행함과는 전혀 관계없이, 오직 믿음만으로도 구원을 받고 취소될 수가 없다고 한다면 다음 구절들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전 6:9,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린도후서 5:10)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 (베드로전서 1:17)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요한계시록 20:12,13)
위에 언급된 구절들만 봐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하는, 즉 구원을 받지 못하게하는 여러 가지 원인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심판받는 근거는 선악간에 우리가 행한 것들 즉 각 사람의 행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오직 믿음만을 근거로 한 것이고 우리의 행함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하면, 왜 성경에서는 우리의 심판의 근거를 우리의 행실과 연관하며 범법행위를 했을 때 하나님의 나라를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던 것일까요??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극단주의자들은 또 이렇게 변명을 합니다.
“너는 과연 너의 행실로 볼 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정도로 100% 깨끗한가?
그 구절들이 의미하는 바를 성경에 근거해서 바르게 해석하거나 반증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얼마나 잘났냐?”는 식으로 비아냥거리며 논점을 일탈합니다. 저는 그렇게 질문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답변을 합니다.
“물론 저는 완벽하지 않고 행함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자격이 못됩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분명 행함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죄를 저질렀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절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지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범위 안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할 때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속죄의 은혜에 온전하게 의지했을 때에 그분 앞에서 100% 의로운 것으로 선포되어질 것임을 믿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 안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 것, 이것이 바로 야고보고 말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라는 과정입니다. 되는대로, 자기 주관대로 임의적으로 행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 이것은 죽은 믿음이며 우리의 구원과 무관한 믿음이라는 것이지요.
이는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잘 나옵니다. 각 사람에게는 달란트, 즉 믿음의 분량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의 분량을 잘 지키고 발전시킨다면 모두가 하나님께 동일하지요, 하지만 달란트를 그대로 묻어 둔 사람, 다시 말해서 믿음의 분량대로 행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손 놓고 바라만 본 사람들은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불리며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는 말씀(마태 25:25,30)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처한 행실에서 얼마나 최선을 다하느냐입니다. 100% 완벽하게 계명을 지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자기에게 주어진 믿음의 분량대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문제는 아무 것도 행하지 않고 그저 손놓고 있는 사람들이지요. 믿음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면서 주님의 명하신 것들을 행하지 않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행함을 강조한다고 하여 그것이 “은혜”를 훼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치고 의롭게 살려고 노력한다 해도 결국에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그분의 “은혜”로 인함입니다.
“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 후에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은혜에 의한 것임을 우리가 앎이라.” (니파이후서 25:23)
“그의 은혜로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될지라. 또 만일 하나님의 은혜로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면, 너희가 결단코 하나님의 권능을 부인할 수 없으리로다.” (모로나이서 10: 32)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라 전적으로 우리의 수양과 개인적인 영성과 선행만을 근거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큰 문제가 되겠지요. 하지만 진실된 믿음은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행함과 함께 하는 믿음입니다. 행함과 믿음을 극단으로 분리해서 이해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완전히 왜곡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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