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들은 우리 교회를 일러 ‘이단’이라고 부릅니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님 손에 이끌려 교회를 다닌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그렇게 부른다는 식으로는 막연히 알고 있지만 실제 주변 사람들에게 직접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속상하고 때로는 충격까지 받는다고 합니다.
더욱 웃긴 것은 ‘이단’이라는 말이 특정 교단의 교리를 근거로 그와 다른 가르침을 전하는 단체를 지칭하는 것인데 종교도 없고 무슨 종교가 옳고 그런지에 대한 관심도 없는 일반 사람들조차 누군가 ‘이단’이라고 부르면 색안경을 끼고 그 단체를 반사회적, 반윤리적인 곳으로 오해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일례로 지금 부천와드가 세워져 있는 여월동이나 청라와드가 있는 검암동에서 건축 초기부터 (개신교회 단체를 중심으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해왔었습니다. 그 주된 이유가 이단 종파가 자기들이 사는 마을에 들어오는 것이 불쾌하고 불안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국교가 개신교회도 아닌데 그 개신교회의 교리와 몇몇 차이점이 있는 교회가 들어온다고 하여 그 추운 날 아이들까지 동원해가면서 시위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당혹스러움을 느꼈습니다. 개신교회에서 이단 이단 하면서 교회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를 퍼트리니 실제 아이들이 반사회적이고 반인륜적인 단체에 의해 미혹될까 두려워하던 부모님들이 시위 자리에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니 누군가 우리 교회를 이단이라고 부르면 속상하고, 혹은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까 두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단이라 말을 들을 때 놀랄 필요도 없고, 기분 상할 일도 없습니다. ‘이단’이란 말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같은 육적인 열매(갈라디아서 5:20)를 맺는 행위나 단체를 지칭하거나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사도 24:14)을 지칭하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특정한 가르침과 다른 주장을 하는 경우도 이단이라 지칭되기 때문입니다. (분명 우리의 믿음은 분쟁과 시기에 의한 것도 아니고 우리를 사신 주님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부정적인 의미의 이단이라고 볼 수는 없겠죠)
예를 들면 예수님도 당시 유대교의 입장에서 이단이었으며 그 예수님을 따르는 사도 바울의 경우는 “나사렛 이단의 괴수”(사도 24:5)라고 불렸습니다. (천주교회의 입장에서는 개신교회가 이단이고, 개신교회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이단입니다.)
실제 자신을 고발한 로마 총독 앞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사도 24:14-16)
바울은 자신은 ‘사람들이 이단이라 부르는 길’을 따라서 모든 경전의 기록을 믿고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지녔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이단이라 부르고는 있지만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분에 대해 기록한 성경을 비롯한 모든 경전을 믿고, 영생의 소망을 가지면서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에 다른 사람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사람들에게 이단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면 기뻐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복된 자의 특징을 잘 요약해 주셨던 산상 수훈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태 5:10-12)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으로 인해 사람들이 우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된 말로 거슬려 악한 말을 할 때 좌절하거나 우울해 하기보다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고요? 하늘에서 우리의 상이 큰 것도 있지만 전에 있던 모든 선지자들도 같은 취급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디모데후서 3:12)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이들은 불가피하게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의 원칙과 타협해서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사람들은 박해라는 것을 받지도 못합니다. 따라서 이 교회를 다닌다고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으면 “아~! 나는 경건하게 살고자 노력하기에 박해를 받는구나, 이전에 살던 선지자와 같은 취급을 받다니 정말 영광스럽다~”면서 기뻐하는 것이 어떨까요?
이런 마음 가짐을 가질 때면 누군가 나에게 이단이라고 말하면 “응 나는 이단이야, 그럼 너는 삼단이니?”라고 농담으로 반응할 수 있는 여유가 있을 뿐만 아니라 “왜 이단이라고 생각하니?”라고 되물으면서 오히려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갖게 될 수 있습니다.
실제 제가 선교사업을 하던 때의 일입니다. 서귀포에서 봉사할 때인데 워낙 사람들이 없어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찾아다닐 때였습니다. 어느 개천이 흐르는 곳이었는데 몇몇 사람들이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일단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인지라 저와 동반자는 자전거를 몰아 그 근처에 내려 그 사람들에게 다가갔습니다. 왠 낯선 이들이 오는가 싶어 사람들이 쳐다봤는데 그 중에 특히 어떤 아주머니는 저희를 보자마자 얼굴색이 빨갛게 변하더니만 삿대질을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는 듣기조차 민망한 온갖 욕설을 쏟아 부었습니다. 지금껏 살면서 그렇게 욕을 많이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그 내용인즉 ‘거짓된 교리로 깨끗한 서귀포를 더럽히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에 다니시는 분이신데 어떻게 저렇게 악을 쓰면서 욕을 하는지 의아해 할 정도였고 주변 사람들조차 민망해 그 아주머니를 만류할 정도였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욕을 쏟아부었습니다.
처음 본 낯선 이에게 욕설을 듣는 일은 정말 불쾌한 일이고, 밤잠 이루지 못할 정도로 기억에 오래 남는 법인데 당시는 정말 마음이 평온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느라 과거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욕을 먹는 것이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아주머니가 떠들건 말건 간증을 나누면서 평온하게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길거리에서 몇 번 만났는데 그때마다 욕을 하고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가면서 비아냥 거리셨는데 그저 웃음만 났었습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점차 욕의 강도가 약해지더니 존댓말까지 하는 기적(?)을 맛보기도 했었습니다.
선교사업 때의 그 경험 이후로 누군가 우리 교회에 대해 악의적인 소리를 하더라도 기분이 상하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실제 우리 모두 동일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속상해 할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셨거든요, 오히려 그런 자들은 복이 있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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