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역사와 교리/조셉 스미스

나부 익스포지터의 파괴명령

모로나이 2022. 6. 30. 13:14

우연히 검색하다가 들어와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간단히 소개를 드리면 저는 님이 컬트라고 부르는 단체 중에 하나인 몰몬교, 공식 명칭으로는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에 다니고 있는 성도입니다.

 

님이 소개글에서 올리신 것처럼 어떤 주장에 대해서 증거들을 세심하게 살피고 자신의 주장이 잘못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항상 유지하는 것의 중요함을 알고 있습니다. 저도 항상 그런 태도를 갖기 위해 노력하면서 님이 말하는 컬트적인 요소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님이 올리신 주장에 대해 증거들을 세심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조셉 스미스의 사망과 그 원인으로 언급하신 출판사 파괴나 일부다처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면 좋겠습니다.

 

1. 윌리엄 로와 나부 익스포지터

 

윌리엄 로

님께서는 조셉 스미스가 윌리엄 로의 아내에게 청혼을 했다가 거부당하자 둘 다 파문하여 이에 악심을 품고 출판사를 만들어 신문을 발행했는데 조셉은 이에 분노에 휩싸여 해당 출판사를 파괴했다고 했습니다.

 

사실 관계를 분명하게 할 필요는 있습니다. 윌리엄 로가 당시 일시적으로 행했던 일부다처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그가 파문당한 결정적인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일부다처가 소개되었을 윌리엄 로를 포함한 당시 많은 이들이 이에 대해 받아들이지 못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부가 파문을 당한 것은 아니었지요.

 

사실 윌리엄은 그 당시 자신이 간음죄를 저지른 상태였고 이에 대해 조셉의 형인 하이럼에게 진실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살 자격도, 그렇다고 죽을 자격도 없는 것만 같다고 토로했지요. 그래도 그의 아내인 제인과 영원히 인봉되고 싶었기에 조셉에게 그것이 가능한지를 물었고 조셉은 그가 간음을 저질렀기에 그 의식을 받을 수 없다는 계시를 답으로 주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윌리엄의 마음에는 조셉에 대한 분노가 싹트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Clayton, Journal, June 12, 1844; see also Cook, William Law, 25) 그 이후로 윌리엄과 그의 아내 제인은 성도들이 모이는 모임에서 발길을 끊었고 (Joseph Smith, Journal, Dec. 30, 1843, in JSP, J3:154) 제인은 남편에게 그냥 재산을 조용히 처분하고 다른 곳으로 떠나자고 제안을 했으나 윌리엄은 조셉을 짓밟고 싶어했으며 조셉을 반대하는 이들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교회에서 직책을 잃고 파문됩니다. 그는 그들이 살던 나부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자는 제인의 제안을 외면한 채 조셉에게 대적하여 그를 끝장내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히게 됩니다.

 

윌리엄 로는 파문된 이후에 모임을 주최하여 조셉을 타락한 선지자로 비난하고, 새로운 교회를 조직했는데 그 모임에서 윌리엄의 추종자들은 그를 새 교회의 회장으로 추대했습니다.

 

그 이후 윌리엄과 그의 추종자들은 Nauvoo Expositor(나부 익스포지터)라는 신문 발행 계획을 공표했으며 이 신문에 “나부시에서 일어나는 일을 있는 그대로 완전하고 솔직하며 간결하게” 진술할 것이라고 천명하였습니다.

실제로 윌리엄 로가 단언했듯이 1844년 6월 7일에 나부의 거리에 Nauvoo Expositor(나부 익스포지터)가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그 신문의 머리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었다.

 

“우리는 조셉 스미스가 가르치는 악랄한 원리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 원리들은 정녕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가르친 원리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위대한 힘으로 일어나 이 땅에서 폭군과 악당들의 영향력을 몰아내자!”며 당시 사람들을 선동하게 됩니다. (Francis M. Higbee to “Citizens of Hancock County,” June 5, 1844, in Nauvoo Expositor, June 7, 1844)

 

다시금 정리를 하자면 윌리엄 로가 간음을 저질렀기에 그의 아내 제인과 인봉(죽은 이후에도 영원히 가족 관계를 이어지게 만드는 교회의 의식) 의식을 받을 수 없자 이에 대해 조셉에게 불만을 늘어놓고 공개적으로 추종자들을 모아 교회를 비판하여 나중에는 새롭게 교회를 세운 사람이 만든 것이 나부 익스포지터라는 신문입니다. 그가 정면으로 내세운 일부다처 교리는 그의 주장에 명분을 주기 위한 것일 뿐 실제 그가 파문된 것은 간음과 교회에 대한 공개적인 반대 때문이었습니다.

 

 

 

2. 조셉의 반응

 

나부 익스포지터가 발행된 그 다음 날인 6월 8일 토요일과 그다음 월요일인 6월 10일, 그에 대한 조치를 결정하기 위해 나부 시의회가 소집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은 단지 신문사가 교회를 반대해서가 아니라 당시 성도들이 미주리와 오하이오에서 극심한 폭력을 경험했고 일리노이에서의 긴장감이 더욱 고조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신문이 성도들에 대해 더욱 많은 폭력을 조장할 것이 염려되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다른 이들의 부적절한 언행을 용인하기 힘들어 해던 19세기 문화의 영향도 컸기 때문에 당시 남자들은 자신의 성품에 대한 모욕을 참기 힘들어했던 것도 있습니다. (See Bertram Wyatt-Brown, Southern Honor: Ethics and Behavior in the Old South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2))

 

 

또한 조셉과 나부 시의회는 자신들의 그러한 행동이 합법적으로 판단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정부가 출판을 방해하는 것을 금지하는 미합중국 수정헌법 제1조는 연방 정부에만 적용되었으며, 1868년에 수정헌법 14조가 통과되기 전까지는 주 정부 및 지방 정부에는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조셉 스미스는 시의회 모임 중 미국의 판례와 윌리엄 블랙스톤의 주석(관습법에 관한 영향력 있는 논문)을 인용하며, 이러한 자료들에 근거를 두고 익스포지터가 사회의 안전과 복지에 위해를 가하는 사회적 골칫거리이기 때문에 폐간할 수 있다고 해석했던 것입니다.(1929년이 되어서야 주 대법원은 신문사 폐간을 “불법적 방해”로 인정하였지만 훗날 미합중국 대법원은 이 판결을 파기했다.)

 

다시금 정리를 하자면 이렇습니다. 조셉이 나부 익스포지터를 파괴하도록 한 것은 단지 그 신문사가 교회를 비판해서가 아니라 당시 그릇된 소문으로 인해 수많은 폭력과 사는 곳으로부터의 추방, 심지어 학살까지 경험했기에 그 신문사가 퍼트리는 그릇된 소식들이 이러한 잔인한 행동을 더욱 부추길 것이 염려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회의 안전과 복지에 위해를 가하는 사회적 골칫거리의 경우는 시의회의 권한으로 정리할 수 있었던 당시 분위기도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당시에는 발행 신문을 없애는 것은 합법적이었죠.

 

 

3. 그 이후의 사건

 

익스포지터의 폐간은 비록 합법적으로 진행된 것이기는 하지만 당시 사회에서 논란거리가 되었고 당시 일리노이주 워소에 살던 토마스 샤프라는 대표적 반몰몬 신문 편집장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성도들을 반대하는 데 행콕군 시민들을 동원하기도 했습니다. 일리노이주 주지사 토머스 포드는 내전을 막기 위해 나부 시의회가 신문사를 압제한 사건의 법적 정당성을 검토했으며, 조셉 스미스가 군청 소재지인 카테지에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결정했기에 보호해 주겠다는 포드의 약속을 받아들여 순순히 응했지만 결국 자신의 행위를 법정에서 변호할 기회를 받지 못했고 폭도들이 기습하여 그와 그의 형 하이럼을 살해하게 된 것입니다..

 

 

익스포지터의 폐간과 관련하여 법적 정당성을 검토하기도 했으며 조셉에게 변호할 기회를 주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반몰몬 언론사에 의해 동원된 폭도들에 의해 조셉과 하이럼이 무참하게 살해된 것이 이번 사건의 결론입니다.

 

<성도들 제1권에서 대부분의 글을 인용, 정리하였습니다>.